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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은 글에서 사르트르는 기분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과분한 사랑속에서 살았던, 냉철한 논리를 가진 못생긴 사내였다. 나와 2/3 정도 닮았던 그런 사내는 나와 2/3정도 유사한 기분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국 현대 산업사회학계의 거장이자 세계적 명저인 '산업사회와 노동계급의 재생산'의 저자인 완소남 김왕배 교수는 언젠가의 수업 시간에 출석을 부르며 내게 'Long time no see' 라는 시시껍절한 농담을 던졌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시시껍절한 농담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시시껍절한 C+를 받았다. '욕 먹는 놈이 장수한다'는 일상적 발화를 정치경제학적으로 담론화해내는데 성공한, 통찰력으로 가득한 나의 레포트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런 반감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결정적으로 잘생겼다. 사르트르와 달리 잘생겼다는 말이다.
그런 그는 2002년 2학기의 어느 수업 시간에 사르트르를 인용했다. 2007년 8월 바로 내가 인용하고 싶었던 부분을 인용했다는 점에서 그는 선지자적 통찰력을 갖춘 훌륭한 사회학자인 것이다. 요지는 이러했다. 그에게는 학창 시절 짝사랑하던 어느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우리의 완소남 김왕배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르트르를 읽어보셨나요' 혹은 이런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르트르는 읽어 봤니?' 최악의 경우엔 이럴 수도 있다 '사르트르는 읽어보셨삼?' 아무튼 대충 이런 식이었다. 당황한 우리의 완소남 김왕배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특정한 사안에 대하여 대답을 찾지 못한 사회학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미덕-침묵-을 선보이고 있던 그에게 그녀는 말했다. 아아.
'모든 인간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객체화되기에, 당신과 나는 서로 주체로 설 수 없어요.'
아아. 맑스에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있었던 것 처럼. 김용택에게 '섬진강'이 있었던 것 처럼, 이천수에게 비호감이 있었던 것 처럼, 조승희에게 글록18이 있었던 것처럼, 사르트르에게는 '자의 시선'이 있었다. 그렇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은 얼어붙은 콘돔처럼 산산조각 나고 말았으니!
그렇다. 인간에게 타인은 좋게 봐야 객체다. 그리고 기억이 정확하다면, 사르트르는 여러 전제들에서 시작한 추론으로 아마 이런 결론에 도달했었고, 그리고 절망했었다. 아시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나 (못생긴) 실존주의자이자 (어설픈) 맑시스트에게 절망은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하여 뭔가 해석학적인 용어를 끌어쓰면서 인간은 그래도 연대할 수 있다 어쩐다 하는 헛소리를 시작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문자 그대로 헛소리다. 사르트르는 사회학자의 덕목을 발휘하여 '연대'에 대해서는 침묵-그러니까 아가리 싸물고 닥치셨어야 올바르다.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히기 마련이니까.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얼싸 좋네, 아좋네 군밤이요. 에헤라 생율밤이로 구나(BGM'바람이 분다'참조) 냉철한 논리를 제외하고는 나와 여러 가지로 유사한 이 사내는 결론을 잘못지었다. 차라리 나라면 이런 결론을 지었을 것이다 :
<...가능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연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온전히 자력으로 비행할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를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비행을 '인간의 비행'이라고 간주한다. 가능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연대가 아니지만, 절망할 것은 없다.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페니스 혹은 클리토리스로 호두를 두쪽 낼 수 없다거나 하는 것에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이 타인을 자신의 시선으로 객체화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인간을 객체화하고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시선에 의한 객체화는 분명히 객체화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소통을 불가능케 하는' 종류의 객체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가능을 전제하고 불가능을 연대로 넘어서자는 인간 승리적인 철학은 충청도 멍청이들에게나 유효하다.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이 아니었다. 내가 나이브하고 그리하여 '철학적 자살'을 감행한 게 아니다. 좆병신인건 당신이다.
문제가 되는 건 차라리, 헤겔씨가 말한 주인-노예의 주체-객체 관계이다. 타인은 나의 시선 속에서 '나의 시선 속의 노예'가 되며, 이것은 극복 불가능한 문제다(물론 당신이 좆병신이면 극복 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시선 속의 노예'나부랭이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않거나, 추상적인 인간소외를 일으키기 떄문이 아니라고 맑시스트들은 말한다. 난 맑시스트가 아니지만 일정 정도 동의한다. 그렇다. 소외에서 문제도는 것은 시선 나부랭이가 아닌, 관계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의지를 가진 이가 관계의 주체가 되고, 그의 의지에 의해 객체의 삶이 이끌려진다, 는 것이 아마 헤겔의 주체-객체 문제였을 거다. 아니면 말고. 이런 상황에서 사르트르 나부랭이의 주체-객체론은 뭐랄까 '일등병 나부랭이 탱탱부랄이 전역 후를 걱정하는 꼴같잖은 꼴'에 가깝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바로 '주체의 객체화'다. 평범한(적당한 죄를 지고 적당한 선행을 베풀며 살아가는) 시민 K는 다른 주체의 의지에 의해 객체로 전락한다. 그가 살아나올 방법은 하나뿐이다. 얼마 전에 진중권이 한마디 씨부려서 유행어가 되어버린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신이 등장해서, 혹은 대천사 미카엘이 불칼을 닥치는대로 휘둘러서 신나는 학살극을 벌이면 간단하다. 영화 '밀양'을 떠올리면 간단무구하다. 전도연은 어떤 신적인 문제가 아닌, 다른 주체의 행위에 의해 객체가 된다. 그렇게 객체가 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겨우 기도하는 공간에 돌을 집어던진다거나, 성령 부흥회에 사소한 테러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다시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체는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좋은 그 아저씨다. 그는 교도소에서 반성함으로 끝끝내 주체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주체는 끝끝내 주체여야 한다. 어떤 주체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심지어 전두환 마저도, 심지어 이 글을 읽는 저주받기 위해 태어난 당신일 지라도, 객체가 되면 안된다. 지구에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주체의 고결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객체도 주체이고 싶어한다.
하여, 나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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