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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1980년의 5월에 태어났다. 그의 생일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몇 달이 지나고 1980년의 끄트머리에서 존 레논이 피격당했다. 소녀는 삼일 뒤에 태어났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는 전라남도 광주 혹은 뉴욕 맨하탄과 별 다른 상관이 없는 곳에서 태어났다-소년과 전라남도 광주 까지의 거리는 소년과 소녀의 거리만큼이나 멀었다. 1980년은 의미 없는 죽음들과 의미 없는 삶으로 점철된 그런 해였다. 마치 1981년과도 같았다. 1981년. 사실 소녀는 1981년에 태어난 것일 지도 모른다. 소녀의 가족들은 달을 다 채우지 못 하고 나온 소녀가 곧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소녀의 출생 신고를 늦추었고 덕분에 소녀의 생일은 공식적으로 1981년 1월의 어느 날이 되었다.
3월 이전에 태어난 소녀는 법적으로 다른 나이인 소년과 같은 해에 학교에 입학하였다. 소녀가 달수를 다 채웠더라면 그래서 그녀가 두 달 정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들은 진작에 엇갈릴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나이를 먹은 소년은 종종 중얼거렸다. 소년과 소녀는 다른 곳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갔다. 둘의 시간은 무참히도 더디게 흘러갔다. 무참히 더딘 시간은 결국 소년과 소녀를 고등 학교에 입학하게 만들었다. 소년은 여전히 평범했고 소녀는 여전히 작았다. 1999년 그들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같은 대학은 아니었다. 같은 전공도 아니었다. - 1999년 5월의 어느 날인가 처음으로 그들의 시간이 마주쳤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 서울의 거리는 5월답지 않게 무더웠다. 소년이 기억하는 5월은 소녀로 압축된다. 5월의 어느 날이었을까. 노동절이었는지도 모르고 소년의 생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너 명의 선배들과 함께 서 있다가, 어느샌가 멍청한 얼굴로 인파에 쓸려다니던 소년은 옆에 선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S대학교 사람들 어디 있는지 혹시 아세요?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분명 이 근처에 있었는데, 깃발이 안보이네. 소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년보다 이십 센티미터 작은 소녀의 눈에 조그마한 S대학의 깃발이 보일 리는 없었다. 저쪽이네요. 소녀 근처의 어느 선배가 말했다. 그리고 그 저쪽부터 사람들이 무너져 내렸다. 소녀의 선배는 소년을 데리고 함께 뒤로 달리며 외쳤다. 야. 뛰어. 엉겁결에 소년은 소녀의 학교 선배들과 함께 뛰게 되었다. 소년의 세계에 소녀가 들어왔다. 소녀의 세계에는. 글쎄. 소년은 잘 모르겠다고 추억한다. 소녀의 선배는 소년을 소년의 대학 선배들에게 데려다주며 소년의 선배에게 이야기했다. '신입생 데리고 와서 흘리고 가면 어떻게 해. 넌 여전하구나.' 소년의 선배는 슬픈 웃음을 지으며 '내가 그렇지 뭐' 라고 대답했다. 담배 한 대 길이의 침묵이 흘렀다. 다음 회의 때나 보는 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중얼거리는 소년의 선배를 남겨두고, 소녀의 선배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훌쩍 사라졌다. 형, 저 분 어느 학교 사람이에요? 형, 이라 불린 소년의 선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소년의 '형'과 두어 명의 선배들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술집에서 술을 진창 마셔대었다. 한 차례 민중가요가 흐르고 형은 소년에게 말했다. 저기 저 대학. 보이지? 아까 그 사람들, 저 학교 사람들이야. 저기나 여기나 옛날에는 사람 참 많았는데, 이젠 기껏해야 두세명 남았구나. 소년은 괜시리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술을 진창 마시고, 형의 비좁은 하숙방에서 잠들었다. 잠들기 전, 형은 비틀즈를 들으며 어설픈 발음으로 따라불렀다. 소년은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 소년의 오월은 오월에 있는 무수한 날들처럼 정신없이 흘렀다. 노동절.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5 16 군사쿠데타. 이틀 뒤에 있던 그의 생일. 석가탄신일. 한총련 출범식. 오월에는 날들이 참 많아. 그런데 내 날은 언제일까. 소년은 자주 중얼거렸고, 중얼거릴 때 마다 소녀가 떠올랐다. 우리는 한총련 출범식 안 가요? 소년은 형에게 물었고 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다지. 갈 이유가 없잖아. 지금 남한에 필요한 건 민족해방이니 하는 게 아니잖아. 유월 첫 주에 우리 조직 회의 있으니까, 미리 이것저것 좀 읽어 둬. 올해는 일단 너랑 둘이 가야겠다. 똘똘한 신입생이 왜 이리 없는거야, 제기랄. 형은 소년에게 두꺼운 출판물을 내밀었다. 그렇게 유월 첫 주에 회의가 열렸다. 생전 처음 가 본, 서울 변두리에 있는 어느 대학의 빈 강의실이었다. 거기서 소년은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형은 소녀의 선배를 보았다. 오늘은 잘 데리고 왔네. 소녀의 선배가 형에게 이야기했다. 전에 신세 많이 졌어요. 안녕하세요. 텅 빈 상황을 메꾸려 소년이 어설프게 인사했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소년은 며칠간 무엇인가를 열심히 읽었지만 머리 속에는 온통 소녀의 생각 뿐이었다. 같이 온 애들도 별로 없는데,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쉬는 시간에 형은 소녀의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소녀의 선배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나쁘지 않아. 다음 번 쉬는 시간에, 형은 회의를 진행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우물거렸다. 선배. 우리 학교 이번에 H학교랑 같이 뭐 준비할 것이 좀 있어서 그런데 회의 끝나고 H대 사람들이랑 먼저 나가볼께요. 뒷풀이 같이 못가서 미안해요. 회의는 그렇게 진행되었고, 소년은 너무 답답해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신입생들 의견도 한번 들어보죠, 라고 사회자가 이야기했다. 소년은 손을 들고 나가 되는 대로 지껄였다. 그러니까, 아직 저는 아무것도 잘 모르는 신입생이지만, 남한 사회의 핵심 모순은 더 이상 민족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운운하기에 콜라는 맛있고 비틀즈는 듣기 좋습니다. 아.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물론 콜라나 비틀즈나 자본주의적 상품인 건 맞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뭐라고 지껄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풋, 하는 소녀의 미소였다. 피식, 하는 형의 비웃음은 소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소년은 생전 처음으로 칵테일 바에 가게 되었다. 너, 요즘 돈 많나 보네. 작년에 학생회 선거 하면서 빵꾸난 돈 다 메꿨나봐? 소녀의 선배는 형에게 말했다. 소년은 어제 이틀 정도 굶은 형에게 밥을 사준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정치. 일상. 문화. 그 모든 현대적인 것들에 대하여. 사람들도 다 떠나가고, 우리 이제 뭘 해야 될까. 이제 졸업도 다가오는데. 대학원을 가야 할까. 아니면 조직 일 계속 하는게 나을까. 자못 진지한 이야기에서부터. 멍하게 들려오는 팝송을 흥얼거리는 일 까지. 소년은 간간히 대화에 참여했고, 소녀는 간간히 웃었다. 헤어지는 길에 소년은 소녀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소년과 형은, 소녀의 학교 앞에서 소녀와 소녀의 선배와 작별했다. 형, 내가 한잔 살까요? 소년은 형에게 물었고, 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소년은 생각보다 쉽게 소녀와 사귀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은 함께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 방학, 소년과 소녀와 그들이 아는 많은 사람들이 어느 공장에서 일어난 파업 투쟁에 합류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소녀가 잡혀간 날 소년은 형에게 맞았다. 야. 정신 똑바로 차려. 네가 지금 혼자 흥분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냐? 조금씩 물러서는 전경에게 달려들어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소년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소리질렀다. 우리 학교에 남은 사람 이제 몇 명 없어. 다 졸업하고 군대가고 취직 준비하느라 바빠. 너까지 끌러가면 조직이고 운동이고 혁명이고 뭐고 끝이야. 시시껄렁한 연애 감정으로 일 망치지 말고 좀 쉬어. 니 여자친구, 어차피 1학년에 단순가담이라 훈방 처분되고 모래면 나올테니까 가라앉혀. 그해 여름은 소년에게 뜨거웠다. 소녀에게도 뜨거웠을까? 소년은, 그러기를 바랐다. 파업은 적당히 정리되었고, 잡혀 간 사람들은 돌아왔고, 다친 사람들은 퇴원했다. 졸업을 한 사람들과 취직을 한 사람들, 군대에 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소년은 소녀와 잤다. 소녀는 이야기했다. 오늘이 내 생일이야. 소년은 언젠가 읽은 시덥잖은 소설을 떠올렸다. 왜? 나랑 잔 날이라 다시 태어난거야? 소녀는 소년을 비웃었다. 아니. 오늘이 내 원래 생일이야. 주민등록상 생일은 내 생일이 아니거든. 단순한 소년은 숫자에 약했다. 생일을 다시 외워야 되네. 힘든 일인데. 소년과 소녀는 낄낄거렸다. 생일에 섹스라니. 어딘가 그럴싸한걸. 내 생일도 오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 상관 없는 우리도 이제 아무 상관이 있구나. 네가 세상 만큼이나 두렵고 사랑스러워. -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세기말을 넘어 2학년이 되었다. 함께 거리를 뛰어다니던 친구들은 어느새 도서관으로 고시원으로 사라졌다. 고시원으로 사라진 소년의 한 친구는 술을 마실 때 마다 칼 포퍼를 언급했다.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지만, 늙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는 건 바보짓이지.' 21세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더 바보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젊건 늙건,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건 마음 편히 연애를 하는 것 만큼이나 바보스러운 시대였다. 소년의 친구는 전경의 방패에 긁혀 만들어진 얼굴의 상처를 자랑스레 내보였다. 청춘의 상처야. 그는 씨익 웃었다. 소년은, 겨우 일 년 전의 일을 추억처럼 이야기하는 그의 친구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소년의 친구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너바나를 불렀다. 이십 년 뒤에 남는 노래는 무엇일까? 나는 유치한 민중가요보다는 너바나나 비틀즈에 만원 정도 걸겠어. 소년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지금은 21 세기야, 비틀즈나 너바나로 폼을 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어 이미. 소년은 어디선가 들은 말을 덧붙였다. "있잖아, 96년에 어느 운동권 회의에서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 이제 정치의 시대가 아니라 하루키식 표현으로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라고.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데. 저기요, 하루키는 92년부터 많이 읽혔어요. 무식한 티 내지 마세요, 라고." 소년은 형과, 그리고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상처 하나 없는 소년의 얼굴은 어딘가 슬퍼보였다. 가끔 과방에 놀러오곤 하는 친구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언젠가의 무용담을 이야기했고, 소년이 과방에 들어오면 조용히 책을 집어들었다. 소년은 구역질이 났지만 꾹 참았다. 때로 소년은 소녀와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우리는 나중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딘가 시간을 잘 못 잡아탄 느낌이야. 우리가 태어난 시절에 대학 생활을 하는 기분인 것 같아. 그래도 다행이야. 어긋난 시대에서 너라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일 년은 무료하게 흘러갔다. 날짜들은 달력처럼 찢겨나갔다. 열심히 살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혁명, 같은 건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 나은 삶 정도는 허락되지 않을까. 소녀에게 건넨 말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었는지, 소년은 기억하지 못한다. 21세기의 첫 해 역시 의미 없는 죽음들과 의미 없는 삶으로 점철된 그런 해였다. - 이듬해 3월, 소년은 군에 입대했다. 대학에서 빨갱이짓 하느니 군대나 갔다와서 정신차려라, 라는 아버지의 불호령 덕분이었다. 폭력이 양념처럼 박힌 홀아비의 불호령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소년은 스스로 우스워졌다. 빨갱이짓이라. 대학에서 2년 동안 그가 제대로 한 것은 연애질 밖에 없었다. 형, 저 결국 군대가요. 올해 똑똑한 신입생들 많이 모아놔요. 저 제대하고 다 거둬둘 테니까. 형은 웃으며 대답했다. 고생해라. 나도 고생해야 되겠다. 너 군대가면 형도 이제 취직 준비 해야지. 할 수 없는 일이지 뭐. 부모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요즘 돈이 모자라.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회사에서 좋은 노조라도 만들면서 살아가야지. 더 이상 대학에서 뭘 할 수는 없겠다. 아. 너 때문은 아냐. 내가 힘들어서 그래. 세상이란 대상은, 살아가는 실천 보다 힘든 것 같아. 엇나간 시간이 이제 돌아온 것이다, 라고 소년은 느낀 것 같다. 지겹도록 읽어 왔던 80년대 넋두리 소설의 비루한 장면들이 눈 앞을 스쳐갔다. 21세기인데, 라는 중얼거림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소년은 군대에 가고 형은 취직을 준비한다. 대학에 다니던 모든 친구들이 그랬던 것 처럼. "나 군대 가"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긴, 지금이 아니라 해도 언젠가 너는 군대를 가는구나. 할 수 없지. 잘 다녀와. 너 제대할 즈음에 나 졸업하겠네. 소년은 그 때가 너무 슬퍼졌다. 졸업이라니. 잘 있어. 다녀올께. 그런데 네 생일이 언제였지? 존 레논 죽기 이틀 전이었나 삼일 전이었나? 뭐야. 사귄 지 이 년이나 되었으면서, 존 레논의 기일은 기억하면서 내 생일은 기억 못하는거야? 소년은 나름대로 행복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고 느낀 것 같다. 소녀와 함께한 시간들. 형과 함께 한 시간들. 그는 어딘가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점도 개판이고, 후배들은 과거의 선배와 친구들이 그랬듯 이곳저곳으로 사라져갔지만, 아무 것도 되는 건 없었지만, 어쨌거나 행복했다. - 소년은 그렇게 군 생활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아쉽게도 소년은 소녀와 헤어지게 되었다. 소년이 군인이었던 것이 문제일 지도 모르고, 소녀가 졸업반이었던 것이 문제일 지도 모른다. 혹은 단지 소년 소녀의 문제였을 지도 모른다. 형은 조그마한 중소 기업에 취직했다. 영어도 잘 못하고 학점도 낮은데다, 수감 전력까지 있는 전직 학생운동가를 채용할 만한 회사는 그렇고 그런 곳 밖에는 없었다. 제대하던 날, 소년은 형과 함께 갔던 술집에 들르려 했으나 술집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도로가 놓여 있었다. 소년은 낮은 목소리로 그곳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를 중얼거렸다. 소년은 제대했고, 소녀는 일 년의 휴학을 한 덕에 아직 졸업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소녀에게는 다른 소년이 있었고, 소년에게는 돌아 올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돌아 온 학교에 그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소년이 몇 번 시덥잖은 연애에 실패할 동안 소녀는 졸업에 성공했다. 소년은 언젠가 스스로의 삶을 비웃었다. 운명적인 이야기 치고는 지나치게 논리적이군. 그러니까, 뻔하단 말이야. 소녀의 졸업식 날을 잊고 지나친 다다음 날이었다. 소년은 줄곧, 때때로 소녀를 만나고 싶었다. 소년이 복학한 해의 오월 동안, 삼십 일 정도 소년은 소녀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소년에게 적대적이었다. 시간. 단순한 소년은 시간이 소년에게 적대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복학생이 아니라면, 소녀가 졸업반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소년에게 적대적인 것이 과연 시간일까. 의외로 시간은 소년에게 호의적이었다. 적어도 몇 년 전에는. 사실 소년에게도 확신이 없었다. 다만 소년은 언젠가 소녀를 이렇게 울렸다. 슬퍼. 너는 언제나 시간이 없구나. 시간이 있을 때의 너에게는 내가 없었고. 그리고 우리의 시간은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는구나. 생각해보면 울 만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무감각한 소년은 때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시간은 그들을 비껴나갔다. 이듬해 소년의 감정은 많이 가라앉았다. 이듬해의 오월 동안, 소년은 고작해야 스물 아홉 일 정도 소녀를 보고 싶어했다. 소년은 소녀와 고작해야 한 번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있었다. - 시간이 흘러 소년이 졸업반이 된 해에, 소년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가만히 어떤 계산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소년이 졸업함과 동시에 소녀는 아마도 대학원을 졸업하고 정치 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학을 가게 될 것이다. 그가 졸업함과 동시에 소년은 아마도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 때 시공간을 공유했던 그들이 더 이상 시공간을 공유하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완전하게 불가능했다. 아마도 소년이 소녀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은 소년의 졸업식 날 정도일 것이다, 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둔한 예상도 떄로는 맞는 법이다. 소년은 그렇게 어딘가에 취직했고 소녀는 뉴욕이 아닌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러는 동안 형은 소녀의 선배와 결혼했다. 그 즈음에 소년은 또 이런 생각을 했다. 옛날에는 나와 소녀의 문제였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소녀의 세계에 내가 존재한다 해도, 아무런 것도 이루어 질 수 없구나. 시간이 도무지 맞지 않잖아. 차라리 소녀가 졸업반이던 시절이 소년에게는 유리했을 지도 모른다, 는 늦은 후회가 소년에게 덥쳐왔다. 그 시절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했을지 몰라. 소년은 그렇게 마음껏 절망했다. 소년은 먼 옛적의 기억을 들춰본다. 그 시절에 좀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시간이나 시대 같은 건 탓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군. 소년은 소녀의 졸업반을 함께 한 소녀의 다른 소년이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내 소녀가 헤어졌기에. 어차피 누구의 시간도 누구에게도 유리하지 않잖아. 그렇게 소녀가 출국하는 날, 소년은 혼자서 집에서 잠을 잤다. 밤 늦게 일어나서 소년은 거리를 쏘다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소년의 세계가 아닌 곳에서, 소년에게 한때 친숙했던 노래가 들려온다. 소년은 기억을 더듬어 따라부르지만 노래의 가사는 소년의 기억보다 더디게 시간을 살아왔다. 소년은 두 소절 정도를 따라부르고 그만두고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 먹었다. 상품. 자본주의에서 상품이 어떤 의미였더라. 소년은 상품을 한 번도 이해해 본 적이 없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껏 절망한다. 콜라를 손에 쥔 소년은 학교로 걸어간다. 소년이 졸업한 학교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아니면, 언제가 문제인 것일까. 소년은 때때로 소녀를 사랑했지만 여전히 소년은 소녀의 생일이 언제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소년은 때때로 철 지난 존 레논의 노래를 불렀다. 어느 노래에서였던가, 소녀는 아침에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며 웃었다. 소년은 아침에 아무런 할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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