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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날들의 보석에게, Goodbye.
사라진 신촌의 술집들에, Goodbye. - '52번가 쫑파티 날이로군' 친구의 문자가 왔다. 그런가? 하고 담담하게 넘기기엔 기분이 언짢았다. '52번가 문 닫는건가 그럼?'이라 묻는 나의 문자에 그는 '아니, 주인만 바뀌는 거야. 아예 이상한 사람에게 넘어가는 건 아니고, 단골들 중 하나가 맡게 되었나봐.' 아무 이유 없이 다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작별은 아니구나. 짐 모리슨과 커트 코베인의 포스터와 순대볶음과 기타와 소주와 김광석과 민중가요와 공기밥이 공존하던 신촌에 몇 없는 제대로 된 술집, 신학기 초면 일주일에 세번씩 찾아가던 <52번가>는, 다행히 사라지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며칠 전에, 사라져간 술집들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일들을 하던 찰나, 52번가가 쫑파티를 한다. 다행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인만 바뀔 뿐. 스물 몇 해를 살아오며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보내는 동안 몇 개의 술집들을 만났고, 떠나보냈다. 어떤 술집은 주인이 돌아가시고. 어떤 술집은 그 터가 완전히 살아져 버리고. 어떤 술집은 천천히 사라져갔다. 사라져간 것들은 평생동안 서럽다. <서른즈음에>의 안주가 맛이 없다면 투덜대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라져간 것들은 평생동안 서럽다. - '사라짐'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나는 노량진의 한 술집을 떠올린다. 수능을 끝내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들락거리던 싸구려 술집 <괜찮아요>. 모든 안주가 상상을 초월한 가격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가격. 곱창볶음 1680원. 찌개류가 삼천 원에서 오천 원 사이였다. 우리는 수능이 끝나고 대학 입학이 시작되는 몇 달 동안, 정말로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다.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날이면 술집 근처 상가에서 삼천원짜리 만두국을 한 사발 들이키고. 없으면 곱창볶음에 소주. 소주. 소주. 젊은 날, 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곳. 그 곳은, 정말로, 돌연히, 사라졌다. 아무런 이유도 남기지 않은 채로. 돌연히. 다른 술집이 그 곳에 들이쳤다. 언젠가, 사진을 좋아하던 한 친구가 나를 찍어준 적이 있다. 지금은 헤어진, 연인과 함께. 어쩌면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사진인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함께하지 않는 사람과의 사진. 이란. 그 시절 만나던 친구들과는 이제 서먹하다. 지층 깊은 곳에 퇴적된 아름다운 나의 과거들아. 하지만 나는 지진을 화산을 단층의 뒤틀림을 퇴적물의 분출을 믿으리라. - 그렇다고 해서 그 술집이 내가 처음으로 작별한 곳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최초로 떠나 보낸 술집은 공지영을 필두로 신촌 출신의 몇 몇 문인들이 다루었던 술집 <섬>이었다. 20년 넘게 신촌을 지켜왔다는 술집. 1학년때, 신문사에서 일하던 선배 손에 이끌려 폭탄주를 먹으러 간 그런 술집이었다. 아주머니, 아니 누나는 <섬>의 인테리어 같았다. 아니, 술집 <섬>은, 누나의 몸인 것 같았다. 건강이 안 좋으셨고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오랜 단골들이 인수해서 계속 운영하려는 과정에서 몇 가지 이야기들이 오갔다고 들었다. 누님 없는 <섬>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에서부터 여러가지. 그런 결과로 신촌에는 두어 개의 <섬>이라는, <섬> 출신의 술집들이 생겼다. <섬>과 상관 없는 <섬>이라는 술집도 하나 있고. 아무래도, 상관 없다. 아, 그것을 소재로 한 내 소설 하나는 학내 문학상을 타는 데 실패했다. 나는 공지영만도 못한가보다. - 신촌에는 참 좋은 술집들이 많았다. 지금은 없다. 비록 내가 그리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여러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부대찌개 파전에 소주 먹고 난동피우기 좋은, 자리도 넓고 개방되고 시끄러운' 술집도 있었다.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좋은 곳이었다. <지푸라기>라는 이름의 그 곳은 이를테면 3월에 가장 붐비는 그런 술집이었다. 과반 학생회, 신입생들이 이삼십 명씩 예약해서 와도 두어 개 반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 3월 신촌을 거닐다 보면 핵전쟁이 나기 전엔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곳. 그런데 그 곳도 망했다. 2003년인가, 2004년인가. 어떤 의미에서, 학생회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이 된 곳이었는데. 싸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고. 자리도 편해서 몰려간 사람들과 이곳저곳 테이블 옮겨가며 편하게 만날 수 있고. 이런 곳이야말로 정치의 공간이 아닌가. 그리고 그 곳은 사라졌다. 신촌 지역의 학생운동이 2003년 전후로 급격히 망한 건 <지푸라기>가 사라졌기 때문이야, 라는 농담이 잠시 오갔었다. 지금 '연대껍데기'가 있는 장소다. - 싼 술집이라고 하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두 개의 술집이 있다. 신촌에서 술 좀 먹으면서 00년대 중반(표현이 참 우습다)을 보냈다면 모를 수 없는 집이다. 신촌 기차역 아래 굴다리의 <굴다리집>과, 52번가 옆에 있던 <독수리주>가 그곳이다. 신촌 기차역 아래 굴다리 옆의 <굴다리집>도 한 십년쯤 된 집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모든 안주가 균일 오천원이다. 부대찌개도. 파전도. 고등어도. 없는 청춘들과 자주 가곤 했다. 어느 청춘은 내게 예수님의 은총과 삶의 비루함을 노래했고 어느 청춘은 내게 혁명적 사회주의의 길을 걷자 했고 어느 청춘은 시 나부랭이를 읊었다. 때로 자주 혼자 가기도 했다. 파전과 고등어를 시켜 놓고 혼자 소주를 들이키는 게 한때의 행복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 술집들임에도, 열두 시였나 한시였나에 칼같이 영업을 정리한다는 것이 매력이자 아쉬움이던 술집이었다. 그 옆집에는 이승환의 '애주가'에 나오는 '신촌 구석진 선술집엔 계란말이를 잘하시는 맘씨 좋으신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술집이 있었는데, 자주 가지는 않았다(그 집은, 이승환 포스터와 이승환 팬들의 낙서와 이승환의 사인으로 가득차 있었다). 술집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언젠가 한번 연인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내가 계란말이를 두 개 연속으로 시켜서 크게 싸운 기억이 있다. 그리고 주위로 몇 개의 포장마차가 있었고, '보살집'으로 위장한 성매매 업소들 두어 개. <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까페이자 맥주집인 <무진기행>. 신촌의 구석진 신촌 기차역 옆. 연대 쪽으로 통하는 굴다리에는 그런 것들이 있었었다. 그리고 민자역사와 역사신축, 상가 컴플렉스의 건축과 함께 그런 것들은. 전부 사라졌다. <무진기행>은 창천교회 근처 지하로 이사했다. 그러나 이전, 구석진 건물 쪽방이 주는 매력은 사라져버렸다. <굴다리집>과 <무진기행>과 계란말이집과 점집으로 위장한 성매매 업소와 등등이 있던 자리에는 벤치 몇 개와 가로수 몇 개가 있는, 좁다란 공터가 되었다. 그 좁다란 공터에 어찌 그리 많은 것들이 있었는지. - <독수리주> 신촌에 2년 정도 가히 신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이 집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혹은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만큼 크다. 00년대 중반 신촌 한가운데서, 천원짜리 번데기탕과 이천원짜리 파전을 파는 집이란 건, 오천원짜리 찌개를 판다는 건. 활기찬 성격의 화려한 패션을 즐기시는 전대협 출신의 누님이 운영했었다. 난방 장치 나부랭이는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스피커 나부랭이도 없었다. 그냥 테이블이 즐비하고 술을 마신다. 안주는 미친듯이 싸다. 그래서인지 술집 벽에는 소규모 밴드라거나 학회, 풍물패 등의, 돈 없는 청춘들이 남긴 낙서들이 가득했다. 그런 사람들이 오갔다. 여전히 건재한 <서른즈음에>와 함께, 돈 없고 정신 없는 청춘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2년인가 3년 만에, 정말로 '홀연히' 사라졌다. 홀연히.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적 가격과 비현실적 인테리어를 자랑하던 술집은 그 모습처럼 그렇게 휙, 하고 없어져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건물은 빈 채로 있다가, 최근에 이상한 곱창 집이 들어섰다. 무수한 느낌들이 떠오르지만 정작 할 수 있는 말은 얼마 없는, 그런 당황스런 작별이었다. <52번가> 옆 자리에 있었다. - 홀연히 사라진 술집을 논하자면 역시 <Velvet underground>를 빼놓을 수 없다. 적당한 음악을 틀어주던 적당한 바였고, 적당한 순간, 사라졌다. Velvet undergound의 상징인 바나나가 그려진 간판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한동안 뒷문을 통해서 빈 술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뒷문을 통해 들어가 술집의 폐허 속에서 연인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섹스를 나눴던 한 친구의 말에 따르자면 말이다. 하지만 나와는 별로 상관 없는 술집이었다. - 사실 헤어짐, 혹은 작별이라는 건 대체로 홀연하다. 하지만 질질 끄는 슬픈 종류의 작별도 있다. <탄뽀뽀>와의 작별이 내겐 그랬다. 풍채 좋고, 빳빳하게 선 머리카락과 깔끔한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아저씨와, 그 아저씨의 누나가 함께 운영하던 이자까야 <탄뽀뽀>. 아저씨는 서울대 미대를 나왔고, 누나는 일본에서 음식을 배웠다. 살짝 비싼 가격이 압박이었지만 살짝 비싼 가격을 압도하는 분위기와 결정적으로 요리들은 가격을 고려하지 않게 해주었다. 팔천 원짜리 오뎅탕에서부터 이만원대에 육박하는 장어구이라든가 메로구이까지, 신촌의 술집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그런 수준의 요리들이 있었다. 실제로 주인 분들도 요리에 엄청난 프라이드가 있었다. 아저씨는 언제나 '누나가 건강만 괜찮으면 종로나 강남에서 할텐데'라고 말씀하셨다. 건강. 그놈의 건강이 문제였다. 잘 운영되던 술집은 아저씨 누나의 건강 악화로 잠시 꽤 오래 쉬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길에서 만난 아저씨는 내게 '누나 건강이 안좋아서 이자까야는 힘들 것 같고, 바 형태로 바꿔서 운영해보려는 생각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아쉽게도 그 생각은 성사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오랫동안 <탄뽀뽀>에 바라도 생기기를 기대했지만, 오랫동안 신촌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아저씨는 그냥 그렇게 사라지셨다. 어디 계시는지, 건강하셨으면 한다. - 아마도, 더 있을 것이다. 떠나간 술집들이.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 그런. 이를테면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난, 상도동의 두 술집들처럼. 성대시장 귀퉁이에 있던 <쪼끼쪼끼>. 맥주가 참 맛있었고 체인점 특유의 다양한 안주들이 신기했다(대체로 맛은 없었지만). 딱히 좋을 것도 딱히 나쁠 것도 없는 그냥 그런 술집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 곳이 사라지기 전에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군대에 갈 때 까지 꽤 오랜 시간을 그곳에 그렇게 버티던 <쪼끼쪼끼>는 내가 휴가를 나온 어느날부터,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곳에는 둥그러니 회전초밥 집만 남아 있었다. 젠장. 단골집이 하나 없어졌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동네의 몇 몇 술집들을 전전했다. 어느 집의 맥주 맛은 짝사랑의 추억보다 흐릿했으며, 어느 집의 맥주 맛은 첫사랑의 고통보다 씁쓸했다. 미친 듯이 제대로 된 생맥주를 찾아 동네 술집을 헤매었지만 그런 것을 취급하는 집은 없었다. 딱히 좋을 것도 딱히 나쁠 것도 없는, 평범한 안주와 평범한 분위기의 <쪼끼쪼끼>는 그러나 맥주의 맛에 있어서는 발군이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동네에서 맥주를 마신 적은 별로 없다. 치킨에 곁들인 보리 음료라거나 하는 것은 마셔보았어도. - 같은 상도동 권이지만 성대시장에서 걸어서 삼십분은 가야 하는 중앙대 후문 근처에 있던 바 <Home>도 기억난다. 군 시절, 동네 친구들이 단골이 된 바였다. 어쩌다 몇 몇 친구들이 주인장과 친해졌다. 심하게 친해진 듯 하다. 술값이, 자유였다. 오천 원을 내고 바카디 151을 다섯 잔 정도 마신 날도 있었고, 만원 내고 맥주 병 마시고 집에 간 날도 있었다. 그냥, 유쾌한 엉망진창이었다. 당시의 내 삶이 그랬듯이. - 친구가 그랬다. 과거가 있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나는 그녀에게 동의했었고 여전히 동의한다. 국가 부도가 나지 않는 한 나는 1680원짜리 곱창볶음이나 이천원짜리 계란파전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에라도 입사해서 일년에 사천만원 쯤 벌지 않는 한, 나는 '정말 괜찮은' 이자까야에 갈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소설가가 된다고 해서 <섬>같은 소설적인 술집을 마주치게 될 일도 없다. 지나간 일들은 그렇게 슬프게도 지나간 일들이다. 국가 부도가 나서 곱창볶음이 1680원에 팔린다고 해도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것이외다. 마찬가지로 강남의 이자까야에 매일 드나든다 할지라도. 행복, 이라는 것에 대한 미련을 조금 버리니 살 만하다. 그저 과거엔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저런 좋은 술집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다. 여전히 단골인 <서른즈음에>라던가(아직 외상값을 못갚았다 아 제기랄), 어젯 밤 주인이 바뀌었을 52번가라던가. 그곳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살아갈 만한 곳일 테니까. 그리고 어찌되었건 나는 살아가고 있으니까. 앞으로, 행복할 일 따위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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